가족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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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현암사에 다닐 때 가장 좋았던 점은 편집부와 연결된 테라스에서 식물 화분을 다 같이 기르던 것이었다. 선배들은 점심 시간에 햇볕을 쬐며 묘목과 흙, 화분 등을 사와서 옮겨 심는 작업을 했다. 작은 다육이부터 아이비, 콩란 같은 작은 사이즈부터 남천, 고무나무, 커피나무까지 본격적인 크기의 묘목도 있었다. 이사님이 기르시던 다양한 종류의 다육이에서 떨어져 나온 새끼 다육이들을 길러내는 것을 구경하는 게 퍽 재미있었다.
당시로서는 식물을 제대로 길러내 본 적이 없던 나는, 선배들이 나눔해 준 작은 다육이들을 첫 반려식물로 삼았다. 식물에 물 주는 데 재미를 붙인 나는 매일 매일 물 주는 재미로 출근했다. 다육이들은 선인장 과라 열흘에 한 번 정도만 줘야하지 그렇게 주면 금방 무른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내 화분들만 다 죽었다. 예지선배는 말했다. "정민 씨는 사랑은 하는데 사랑하는 법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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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선생님이 이대 철학과에 적을 두고 계셨을 때 학교를 다녔던 나는, 말 그대로 진은영 시인의 오래된 팬이었다. 시인으로서 그녀를 무척 흠모했다. 그녀의 첫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의 표제시를 줄줄 욀 정도로 좋아했던 나머지, 그녀의 수업을 도강하러 가기도 했다. 주디스 버틀러의 저서를 한 학기 내내 읽는 강독 수업이었는데, 주디스 버틀러의 명성만 알던, 그리고 철학과 전공 수업을 들어보지도 않은 경영학도였으면서 어떻게 철학과 고학년 전공수업을 그렇게 당당하게 들으려 했는지 지금도 모를 일이다. 진은영 선생님은 첫 수업에서 OT 겸 몇 가지 문항지를 나눠주고 손글씨 에세이를 쓰게 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나는 그 항목들에 팬심을 가득 담아 (거의 팬레터에 가까운) 글을 남기고 말았다. 그 글이 내내 부끄러워 그 뒤 수업부터 아예 들어가지 못했다...
이후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에는, 선생님께서 이대 철학대학원에서 매체철학을 가르치신다는 풍문을 들었다. 그 수업도 무척 듣고 싶었지만 타 학교 수업을 들으러 가기는 힘에 부쳐서 실행에 옮기지 못 했다. 결국은 선생님의 대학 강연은 한번도 듣지 못한 채, 독자로서 시만 애통하게 읽고 있다. (선생님께서는 현재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로 적을 옮기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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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시보다 그에 대해 선생님께서 《시와 반시》에 쓴 해제인 아래 에세이 덕분에 오래 오래 기억하고 있다.
문학라디오의 작가 초대 프로그램에 나간 적이 있다. 사회자가 가족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가족제도를 싫어하지만 나는 부모님에게 무척 잘 하는 딸이라고 말했다. 선량하고 사람 좋은 사회자가 웃으며 거들었다.
"네, 압니다. 잘 하시겠지요. 그럼요."
강의하러 갔더니 몇몇이 그 방송을 들었단다. 어린 친구가 무척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님, 정말 부모님께 잘 하는 딸이세요?"
"그럼."
'가족제도를 싫어하면서 부모한테는 잘 하다니, 나이 드니까 변심하는 거 아냐?' 뭔가 배신당했다는 표정이다.
나 이제 나이 들어 내 시를 배신했나? 부모님께 '잘' 하는 게 사실이다. 만나면 웃으면서 다정한 말투로 안부를 묻고 건강을 챙긴다. 가족과의 불화는 없다. 가족을 떠나왔기 때문이다. 일 년에 고작 몇 번쯤 만나고 한두 번쯤 안부 전화를 한다. 명절이나 가족행사에 부르시면 이 딸은 지금 위대한(?) 예술작품을 '황급히' 만드는 중이기에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간절하나 찾아뵐 수 없노라고 공손히 대답한다. 때로는 버럭 화를 내며, 때로는 힘없이 전화를 끊는 늙은 부모님을 나는 사랑한다.
만일 내가 무엇과 불화한다면 아직도 그것과 마찰을 일으킬 만큼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첫 시집의 시 '가족'은 대학시절에 썼다. 그때도 가족을 떠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떠나고 싶어서 열심히 벌었지만 등록금이 가혹하게 비쌌다. 아무리 애를 써도 등록금과 용돈 이상으로는 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족 속에서 가족과 고통스럽게 불화했다. 꿈속에서 총을 쏘거나 아버지, 돌아가셨으면 좋겠어요, 라고 시에 쓰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가족제도를 정말 싫어하기 때문에 나는 불화할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되도록 멀리 떠나왔고 불화할 또 다른 가족도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조금씩 명랑해졌다. 나는 내 시가 더 명랑해졌으면 좋겠다. 나는 '독신자의 불행'에 대해 쓴 명랑한 카프카를 좋아한다. 그가 독신자의 불행한 삶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는 건 바겐바흐가 표현했듯 "더 이상 아버지가 쾅쾅 박아넣은" 삶의 이상ㅡ가족을 꼭 가져야 하고 번듯한 직장이 었어야 한다는ㅡ대로 그가 살지 않기 시작했다는 징표이다.
지금도 가끔 '꿈속에서' 내가 겨우 모은 등록금을 가져가 이자를 물어버린 아버지 때문에 학교 캠퍼스를 엉엉 울며 걷기도 하고, 죽은 꽃들과 물고기들 사이를 헤엄쳐 다닌다. 내가 덮고 있던 이불 위로 할머니가 신장 안의 신발들을 모조리 쏟아붓던 시간을 되살기도 한다. 그래도 나는 지금껏처럼 계속 가난하게 살아야 할 부모님께 잘 할 것이다. 최선을 다해 쓰고 내년 명절엔 두 번째 시집도 가져다드리고 싶다. 가장 사랑스러운 딸의 표정을 지으며 속삭이리라. 엄마, 이게 돈 보다 좋은 거야, 알지? 우리는 앞으로도 둘 다 사이좋게 가난하겠지.
ㅡ진은영, 《시와 반시》 2007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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