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vanquished and unyielding


아트스쿨 컨피덴셜 1: 덴마크에서 만난 한국영화팬 아트스쿨 컨피덴셜

이것은 내가 덴마크 교환학생 시절 엿본 한량들의 무릉도원, 예술가 지망생들의 유토피아에 대한 수기다.

(이 연재글의 제목은 내가 좋아하는 만화가 대니얼 클로즈의 동명 영화에서 따왔다.)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 파견되는 한국인 교환학생은 한 해에 스무 명이 채 되지 않는다. 때문에 아시아 연구를 전공하는 현지 학생들에게 호기심 어린 인터뷰 요청을 심심찮게 받는다. 모르는 사람과의 대면 접촉을 할 수 있는 한 피하는 '닫힌 사회(closed society)' 덴마크의 특성상, 교환학생과의 만남도 정식으로 요청을 하는 경우가 많다. 긴장하고 나가도 실제로는 별로 심도 깊은 대화가 이뤄지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현지인 학생들과 수업 코스워크 자체가 달라 만남조차 어렵다. 그 때문에 아시아인 학생들과 만나고 싶어도 만날 기회를 찾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덴마크국립영화학교에 다니고 있다던 A 역시 그랬다. 한 덴마크인 친구가 한국영화 광팬인 친구가 있다며, 꼭 한번 만나보라고 해서 보게 된 A는, 딱 보기에도 말수 적은 오타쿠였다. 사실 첫인상은 말끔한 외모의 단발머리 학부생이어서 오타쿠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외국에서 만나본 한국영화 팬들은, 기껏해야 외국에 정식 수입된 DVD나 영화제용 아트하우스 영화들에 이끌려, 오리엔탈리즘적인 미학을 풀풀 풍기는 김기덕 류의 영화들만 연호하기 일쑤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A는 첫 마디부터 예상을 벗어났다.

"내가 한국 영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때문이었어."
"뭐? 그 영화를 니가 알아?"
"뭐, 어둠의 경로로."
"......"

김진표와 통신요정 CF모델이 나왔다는 사실 밖에는 기억나지 않는 아주 아주 구린 B급 영화라고만 생각해 왔기에, 나는 한참을 다음 대사를 고를 밖에.

"그 영화감독... 그 영화 찍고 파산해서 빚에 쫓기다가 한국 지방 도시에서 카페 한대."
나는 왜 이런 이상한 영화판 뒷얘기나 기억하고 있었을까. (다 듀게 탓이다.) 
영화 비평을 주로 씨네21이 아닌 듀나게시판를 통해 봐온 터라 해당 영화나 영화감독에 대해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아무튼 한국영화에 대해서는 그가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듯했으므로, 대화의 주도권이 내게는 더 이상 넘어오지 않았다. 신이 나서 이야기하는 그에게 맞춰 고개나 까딱거리면 그만이었다. 덴마크 영화감독이라고는 라스 폰 트리에밖에 모르던 내게, 그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대학시절 기행을 들려줬다. 

"그 사람... 완전 싸이코야."
"왜왜?"
"우리 교수가 그러는데, 그 감독이 재학 시절에 수업이면 맨 끝자리에 앉아서 의자도 아예 뒤쪽 벽으로 돌려버리고 침묵 시위 했대."
"아니 수업은 왜 들어왔대. 미친 거 아니야??"


아무튼 나는 이렇게 아시아 변방에 묻힌 비주류 영화까지 꿰고 앉은 한량 예술가 지망생 학생들을 많이 만났다. 
왜 이런 한량이 유달리 많을까 그 이유를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대학 교육까지 모두 무상이고, 심지어 대학원 석사 코스까지도 일부 전공에 한해 무료 혹은 정부 지원금을 보조 받으며 다닐 수 있는 덴마크의 교육 특성상 그런 것 같다.

전공을 물어보면 "학부에서는 철학, 대학원에서는 건축"이라거나 "경영대 학생인데 졸업 후에 미래학자가 될 것"이라는 둥, "정부에서 용돈 받으려고 대학원 다니는 중"이라는 둥, 내가 만나본 덴마크 학생들은 모두 한량 오브 한량들이어서 배가 몹시 아팠다. 특히, 졸업 후 미래학자가 될 예정이라는 같은 경영대생에게는 남모를 배아픔을 느꼈다. '니가? 니가 몬데 미래를 점쳐.' 그 후로 미래학자는 모두 사이비 점쟁이일 거라는 선입견을 가지게 됐다.

Daniel Clowes, Art School Confidential (1991)


사실 이런 한량 대학(원)생이 아닌, 반대 부류의 상경충 애들도 많이 관찰할 수 있었다. 금융업과 상업이 발달한 국가 특성상 은행권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내가 파견된 학교는 비지니스스쿨, 즉 경영학도들만 모아 놓은 곳이었기에 학부생 때부터 다들 은행원스러운 정장을 빼입고 다니는, 말하자면 재수 없는 애들이 떼로 모여 있는 곳이었다. 

교환대학을 선택할 당시 내게는 경영대 밖에 선택권이 없어서 그러긴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 G 덕분에 타 학교 수업도 무료로 들을 수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말하자면, 대학 수업에 있어서 덴마크 학생들만 평등한 게 아니기에 어느 한 대학에 등록된 교환학생이라면 덴마크 내에 있는 모든 학교 수업을 수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신문방송학과 전공이었던 G는 인문학 위주의 수업이 열리는 코펜하겐대학(Københavns Universitet, 이하 KU)에서 다큐멘터리 제작 수업을 들을 예정이라고 했다. 학생들에게 촬영 장비까지 빌려준다니 나로서는 최고의 기회였다. 나는 당장 그 수업에 등록했다.



(다음 글에 계속...)

덧글

  • 구스 2019/06/27 22:08 # 삭제 답글

    오, 재밌네요! 다음 글이 기대됩니다.
  • 에스프리 2019/06/30 22:31 #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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